자막 제목 with Caption Creator 4

약사의 혼잣말

 

그림자 속에 살며시 숨어있든
상관없잖아

봉오리 같은 꽃도 얼마든
있잖아

비밀로 하고서 지키는 게
좋지 않을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화려하게 피어있어

달콤씁쓸함에 빠지지 않는

그 판단이 부질없어

끙끙 앓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진 말아줘

사랑에 익숙할 턱이 없는
쓸데없이 꾸미지 않은

아름답게 꾸민 꽃병도
비료도 그 무엇도 필요 없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

꽃이 되어서
어서 공허하게 냉소해줘

그 표정이 짜릿짜릿해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맛보아줘
너의 독을 나의 약으로

감싸줄 테니까
웃어줘

 

아버지!

 

아버지.

 

제7화 귀성

 

아버지,

잘 지낼까.

 

그랬지,

어제 원유회 뒤에...

무슨 소리니!

독을 드신 대신은 큰일 나셨다니까!

환자는 편하게 누워있어!

 

덕분에 푹 잘 수 있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한낮까지라니
너무 잤어.

 

이제 와서 맨얼굴은 좀...

 

어머,

오늘 정도는 쉬어도 괜찮았는데.

그럴 수도 없습니다.

무슨 일 있으시면 분부해주십시오.

 

어라, 주근깨는...?

진정이 안 되는지라,
이대로여도 괜찮을는지요?

그것도 그렇구나.

그 시녀는 대체 누구냐고,

다들 따지고 들어서 힘들었으니까.

면목 없사옵니다.

괜찮아.

그것보다 아침부터
고순이 와있는데, 어쩔 거니?

 

한가해보이길래
풀 뽑기를 부탁해놨는데.

 

풀 뽑기...

원유회 때는
상당한 고관의 자리에 있었는데,

역시나 성실한 남자.

 

그 남자는 그 남자대로

시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게 틀림없어.

 

응접실을 빌려도 괜찮겠사옵니까?

 

알았어.

홍낭.

네.

기분 탓인가
홍낭의 눈도 빛나고 있는 듯한.

 

임씨 님으로부터 맡아왔습니다.

 

이건

옥엽 님께서 드셨을 뻔한 국이로군요?

네.

참 정성스러우셔라.

 

드시진 말아주세요.

안 먹습니다.

 

은은 부식이 심해서

지금은 이미 산화해버려서

맛있지 않습니다.

맛있...

이거, 맨손으로 들거나 하셨습니까?

아니오.

그릇은 건드리지 않고,

독인지 아닌지 내용물을
숟가락으로 떠본 것뿐입니다.

그 뒤엔 바로

천으로 감쌌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싹둑 싹둑 싹둑.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솜과 가루와 붓이군요.

네.

이걸로 대체 무엇을?

제가 있던 약 가게에서는

장난 방지용으로

건드리면 안 되는 용기에
염료를 발라놨습니다.

이건 그 응용입니다.

 

간단해요.

작게 뭉친 솜에 가루를 묻혀서

그릇에 묻혀나갑니다.

 

마지막에
붓으로 여분의 가루를 털어내면...

 

나왔네요.

하얀 흔적이 있군요.

사람의 손이 닿은 자리입니다.

손가락 등이 닿으면

자국이 남아버립니다.

부식되기 쉬운 은식기라면
더더욱 그렇죠.

은식기는
쓰기 전에 반드시 천으로 닦습니다.

즉, 지금 여기에 남아있는
손가락 자국은

닦은 뒤에 식기를 든
사람의 것이라고?

그런 겁니다.

손가락 자국의 크기와 위치로

어떤 식으로 들었는지 정도는
추측할 수 있겠지요.

그릇을 든 건...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그릇을 든 건
다 합쳐서 아마 네 명일 겁니다.

네 명입니까.

 

먼저, 그릇 주변을 만진 세 명.

 

국을 담은 자,

상에 올린 자,

이수 님의 기미역,

 

그리고 한 명 더,

그릇의 테두리를 만진 제3자.

 

독을 넣은 건

불명의 제3자임이
틀림없을 거라고 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상급비의 그릇에
기미역의 손가락 자국이...

간단한 얘기입니다.

이수 님의 기미역이 짓궂게도
일부러 바꿔치기 한 것이겠지요,

독이란 것도 모르고.

바꿔쳤다?

괴롭힌 겁니다.

상급비에 대고

시녀가?

믿을 수 없으신 모양이군요.

들려주시겠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억측임을
미리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문제 없습니다.

이수 님의,

원유회에서의 의상을 기억하십니까?

네, 분명 화려하고 짙은 복숭아색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옥엽 님과 겹치는 의상을
비가 골랐을 경우,

시녀는 다른 의상을 추천합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비를 따라 비슷한 옷을
시녀들도 입었을 겁니다.

하지만 수행원들은 다들
하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야
복숭아색 의상을 입은 이수 님은

분위기를 못 읽는 광대나
다름없습니다.

시녀는 주인을
체면을 지켜야 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날...

시녀로서의 입장에 대한 분별도 없나?

복숭아색 옷을 권하다니.

 

한심스러운 이수 님의 시녀들에게

아다 님의 시녀들이 충고한 거였어.

적들이 널린 후궁 안에서

비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시녀들뿐입니다.

 

나이가 어린 이수 님께선

시녀들이 권하는대로 그 의상을 입고,

의도적으로
수치를 당하시게 된 거겠지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으시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식사를 바꿔치기 해서

한층 더 이수비를
곤란하시게 하려 했다?

네,

독이란 걸 모르고.

결과적으로 목숨은 건졌습니다만.

 

마음에 안 드는 방식입니다.

 

어째서 그런 짓을?

이수 님은 어리신 나이에
선제의 비가 되셔서

그 뒤에 바로 출가하신
특수한 입장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몸바쳐 애써야 한다고

어릴 적부터 교육받습니다.

주변에서 보면
죽은 남편의 아들에게 시집가다니

부덕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요.

 

그릇의 가장자리에 있는 자국은

독을 섞은 범인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자리를 잡고
독을 섞어넣은 게 아닌가 하고.

그렇군요.

고귀한 분의 입술이 닿는 곳을
손가락으로 더렵혀서는 안 된다,

홍낭의 가르침이다.

 

제 견해는 이상입니다.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신지요?

 

어째서 어제 그 기미역 시녀를
감싸려 하신 겁니까?

 

단순히 흥미 본위입니다.

추궁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녀의 목숨 따위

비에 비하면
가볍고 가치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기미역의 목숨이야...

 

임씨 님께는 잘 설명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기껏 바꿔줬으니 감사인사는 해야지.

 

독을 맛 볼 수 있었으니.

 

역시 그 국, 마셔버릴 걸 그랬네.

 

이상입니다.

그렇군.

언제 들어도
넌 참 말을 잘 골라서 하는군.

그런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부범이지?

상황으로 보면 그렇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주는군.

이 소란으로 어제부터 잘 틈도 없어.

옷도 못 갈아입었어.

생각하길 포기하고 싶어.

본모습이 나오고 계십니다.

아무도 없으니 상관없지 않아?

제가 있습니다.

그건 좀 봐주고.

안 됩니다.

무슨 소릴 해도 안 되나.

오래 알고 지냈는지라.

태어날 때부터 돌봐줬단 것도
성가신 일이로군.

 

임씨 님, 비녀 꽂으신 채입니다.

아, 이런, 깜빡 잊고 있었군.

머리에 숨어있었는지라,

진짜 신분을 눈치 챈 자는
없으리라 봅니다.

부탁해, 보관.

 

또 그렇게 함부로 다루시고.

 

특별한 분 밖에 지닐 수 없는 것이니

소중히 다뤄주십시오.

알고 있어.

모르고 계십니다.

 

그럼 실례하겠사옵니다.

 

해볼까.

 

그럼 있잖아, 비녀 받고 그랬어?

일단은.

 

그렇구나!

그럼...

 

후궁에서 나갈 수 있겠구나?

 

지금 뭐라고 했지?

후궁에서 나갈 수 있다?

 

그 얘기, 자세히 좀!

 

네...

 

후궁은 바깥 남성과는 못 만나지만,

특별한 허가가 있으면
남성이 여관을 데리고 나갈 수 있어.

 

그것이 원유회에서 나눠준
비녀란 건가.

바로 맞았어!

반대로 비녀를 쓰면

후궁에서 나가게 해줘라고
부탁할 수도 있대.

그렇구나.

고마워, 소란.

시험해볼게.

 

별말씀을.

 

묘묘, 산사 열매 잘 먹었어!

맛있었어!

 

받은 비녀는 다합쳐서 네 개.

남성에게서 받은 비녀는 두 개.

아니,

주요 부위를 잃은 그쪽은
남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나?

 

약사!

 

좋았어.

 

이백 님,

후궁의 여관이 이것을.

 

알았다.

 

곤란하군,
예의상 준 비녀를 진짜로 생각했나.

하지만 미인이 부르는 거면 아까운데.

비취궁 묘묘

 

비취궁의 시녀에겐
한 명밖에 주지 않았어.

그렇단 건...

 

그 자인가.

 

어디,

어떻게 거절할까.

 

실례하겠사옵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누구냐, 넌?

곧잘 듣습니다.

너, 화장으로 변장한단 소리 안 듣나?

그 말도 곧잘 듣습니다.

 

그나저나 참, 나를 부르다니.

본가에 돌아가고 싶은지라.

본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거냐?

신원을 보장해주신다면

일시 귀가는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어이없는 녀석이군.

시녀 신분으로 부관인 내게
신원 보장만을 하라?

네.

 

그걸 위해 일부러 날 불러냈다고?

네.

대담하다 해야 하나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 해야 하나.

 

즉, 뭐냐?

나 보고 아가씨의 귀성에
감쪽같이 이용당하란 건가?

아니요,

이쪽도 나름대로 답례를
해드릴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녹청관에서 꽃구경 한 번 어떠신지?

 

노, 녹청관?

농담이지?

하룻밤에 일년치 급료가 날아가는
고급 기루란 말이다!

걱정되신다면

이 소개장을 보여주시면 알 겁니다.

 

백령, 여화(女華), 매매(梅梅).

 

더더욱 믿을 수 없군!

고급 관료라도

좀처럼 손 대기 어려운
세 공주 아니냐!

믿으실 수 없으면 어쩔 수 없군요.

 

송구스럽습니다.

수고를 끼쳐드렸군요.

그, 그럼...

지극히 유감스럽습니다만,
다른 데를 알아볼 테니

이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이 여자, 달리 믿을 구석이 있는 건가?

그것도 홍수정과 은제 비녀!

명백하게 나보다 고관이잖아!

이 아가씨, 정체가 뭐지?

그렇다면 이 이야기도 영 거짓은...

아니, 아니, 너무 수상쩍어!

 

하지만 혹시 사실이라면,

그 세 공주를 만날 기회 같은 건

앞으로 두 번 다시...

 

난 어떡해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졌다.

 

축하해, 묘묘!

설마 우리보다 먼저 묘묘가!

정말 잘 됐어.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건성이야!

걱정 마세요, 선물은 사오겠습니다.

그 사람이랑은 어떤 경위로?

어쩌다보니?

저 모습을 보아하니,

비녀의 의미 분명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게,

분명.

정말이지, 불쌍한 건 그 아이야.

 

정말 재밌어.

 

그 애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거, 또 한바탕 있을 것 같군요.

 

일을 정리하고
간신히 한가해진 임씨가 찾아온 것은

묘묘가 출발한 이튿날의 일.

묘묘라면 어느 분과 함께 떠나버렸어.

 

사흘 간 귀성하러!

 

고향인 홍등가는

그리 먼 곳은 아니다.

후궁에서 벽과 해자를 건너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마차를 마련하다니, 사치스럽네.

뭐, 녹청관의 세 공주라고 하면

백성들로부터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구름 위의 우상이니까.

 

한 번 만나는 것조차
명예가 되는 존재야.

 

저기 보이는군!

 

홍등가야.

 

그런 존재를 동경해서
유곽의 문을 두드리는 소녀도 있지만,

간단히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허드렛일 하며 견습 기녀가 되더라도

나중에 잘 나간다는 보장은
없는 세상이다.

 

이곳이 녹청관인가.

네.

뭔가 품격이 있군.

중급부터 최상급까지
기녀들을 두루 갖춘

노포 기루이니까요.

 

오랜만이야, 할멈.

 

다들 잘 지냈...

 

뭐가 오랜만이냐, 이 바보 계집.

괜찮느냐?

대체 뭐냐, 이 할멈!

 

녹청관의 점주, 포주 할멈입니다...

 

그립네.

옛날엔 곧잘 이걸로 독을 토해냈지...

 

이게 그 귀한 손님이냐?

생김새로 남자답고 체격도 좋구만.

얘기를 듣자하니 출세 유망주라며?

할멈,

그걸 본인 눈앞에서 말하는 건
좀 그런데.

어이, 백령 불러와라.

오늘은 한가할게다.

네.

백령...

이백 님,

팔 근육에 자신 있으십니까?

몸은 나름 단련했다만.

 

이거, 어쩌면...?

이쪽으로 오시죠.

 

긴장되기 시작했어.

 

잘하고 오세요.

응!

 

묘묘,

정말이지 넌

열 달이나 연락도 안 넣고
사라져버리고.

어쩔 수 없잖아.

보낸 목간, 안 읽었어?

읽었으니 단칼에 거절했을 남자를
이렇게나 챙겨주고 있잖느냐.

알고 있다니까.

지금까지 후궁에서 일한 급료의 절반,

특별히 선불로 받아왔어.

상대는 백령이야.

이것만으론 부족하겠는데.

차 마시는 정돈데 깎아주면 안 돼?

멍청한 것,

저 팔뚝 보고
백령이 아무것도 안 할 리 없잖느냐.

역시.

그치만 그거 불가항력...

불가항력은 얼어죽을!

빠짐없이 계산에 달아둘거다.

아니, 못 낸다니까.

그럼 좋은 손님들 팍팍 보내.

아까처럼 젊고 오래오래 적당히
쥐어짜낼 만한 것들을 말이지.

 

환관이라도 손님이 될까?

 

그건 안 돼.

기녀들이 진심이 돼서
가게가 망할 거야.

 

하지만 고순이나 돌팔이 의사는
맘이 안 내키고...

 

묘묘,

영감은 집에 있을 게다.

얼른 가줘라.

 

거리를 하나 빠져나온 것만으로

홍등가는 갑자기 풍경이 바뀐다.

 

다 쓰러져가는 집들이 늘어서고,

구걸꾼과 매독 걸린 매춘부.

 

변한 게 없네.

 

다녀왔어, 아버지.

 

어서 오거라.

늦었구나.

 

드디어 돌아올 수 있었네.

 

실은 그날,
주근깨 염료 가지러 갔다가 말이야,

거기서...

 

아직 기한이 있어서
모레엔 후궁에 돌아갈 거야.

그러냐.

졸리지만 목욕하고 싶네.

 

내일 녹청관에서 목욕탕 빌리거라.

 

응, 그럴게.

 

후궁이라니,

인과로구나.

 

장식 같은 다정함이 아니라

어디 다 쓸 곳도 없을 만큼의 온기를

그런 제멋대로인 이상을 늘어놓으며
오늘도

말로는 못하고 집어삼키기만 했지요

추억은 아직 금목서

황혼빛을 풍기는 거리에서

웃고 있었겠지

가슴이 애달파서 눈물이 흐르고

그날의 당신 곁에서 빛을 찾아내고

어리광부렸었지

바람이 시끄러워서 귀를 막고 있었어

그런 나로부터 졸업해야겠지

사랑의 말에 발이 걸려 넘어지더라도

 

다음 시간,

밀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