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ene, 2020

조금 더 빨리
진행할 수 있을까요?

 

인터뷰하는 게
편하진 않아서요

 

그러시군요

 

특별한 이유라도...

 

불편한 질문을
자주 하시더라고요

 

그럴 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죠

 

10년 넘게 예술계를
벗어나 계셨잖아요

 

저에 관해
너무 자세히 쓰진 마세요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요

 

전에는 생각 없이
말을 많이 하곤 했어요

 

작품 세계를
설명해 주시겠어요?

 

왜 전쟁과 가난을
소재로 삼으셨어요?

 

그런 주제는...

 

여성 화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요

 

예술가들은 작업할 때

 

자기 작품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지 않아요

 

영감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거든요

 

어느 순간에요

 

전 '여성 화가'로
불리고 싶지 않아요

 

그냥 '화가'죠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아테네움에서
내 그림을 안 걸어 준대

 

예술 기금 100마르카를
내겠다는데도 안 된다네

 

최대한 빨리
날 보러 와 줘, 베스테르

 

너랑 이야기하고 싶다

 

헬렌, 남들 마음에
들려고 할 필요 없어

 

네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해

 

보여 줄 게 있는데
다음 주에 가지고 갈게

 

너의 친구
헬레나 베스테르마르크가

 

정말 못 봐 주겠지?

 

귀신이 봐도 놀라겠어

 

이 그림 사면 좋겠다

 

여성동맹연합 기금으로

 

자반 청어랑
술 좀 가져다줘

 

은박지를 활용할 생각은
어떻게 했어?

 

일본에서 그렇게 하길래
따라 해 봤지

 

- 잘했네
-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들켰네
사실 내 취향은 아니야

 

잠깐만 기다려 봐

 

아테네움에서 대여한 거야

 

피렌체로 갈 작품이지

 

덧칠한 그림이네

 

꼭 늑대 조각상 같아

 

엄청 잘생겼다

 

그러게

 

아주 훌륭해

 

커피와 설탕은
다 떨어졌습니다

 

비누는 아직 남아 있고요

 

세 시간이나 기다렸어요

 

비스킷은요?
엄마가 드셔야 되는데...

 

제 것을 조금 드릴게요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낮에 그림 그려야 되니까
이웃집 꼬마를 시켜야겠어요

 

이제 집안일 좀 해야지?

 

그 얘기
왜 안 하나 했어요

 

자화상을 그리는 건
사실 고된 작업이다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하늘을 그리는 것과 같다

 

참 한심하다

 

항상 볼품없는 얼굴만
그리고 있으니...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헬렌 쉐르벡 씨 댁이 어디죠?

 

- 저쪽이에요
- 고맙습니다

 

미술상 괴스타 스텐만입니다
집 주인 계십니까?

 

헬렌 쉐르벡 씨군요

 

에이나르 레우테르입니다

 

- 무슨 일로 오셨죠?
- 그림 좀 보러 왔습니다

 

보여 드릴 만한 게
없는데요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죠

 

어디 있나...
아, 여기 있군요

 

맞네요
바로 이거예요

 

벽에는 그림을
안 걸어 놓으세요?

 

- 벽에는 아무것도 안 걸어요
- 그렇군요

 

제 작업실 벽에
몇 점 걸어 놓긴 했어요

 

목탄을 사용한 그림들요

 

그럼 좀 있다 가서 보죠

 

내 아들 마그누스가
몇 점을 팔아 달라고 맡겼는데

 

- 전부 돌려보냈더군요
- 왜 그랬을까요

 

전 일단 그림을 넘겨받으면
최대한 다 팔려고 하는데요

 

에이나르도
몇 점 가지고 있어요

 

'나무꾼'과 '자매들'
가우스달 풍경화가 있어요

 

정말 인상적인 작품들이죠

 

제가 소장하고 싶은 작품들은
팔지 않았어요

 

쉐르벡 씨의 작품도
두 점 있죠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마리아 비크 씨가
추천하더군요

 

에이나르도 절 설득했고요

 

이 친구가 엄청 좋아해요

 

꾸밈이 없으시죠

 

인간의 추함이
그림에 드러나잖아요

 

어떤 그림은
세세한 부분을 묘사하신 걸 보면

 

스케치 같기도 하고요

 

그림을
몇 점 가져가실 건가요?

 

전부 다요!

 

그렇다면 가격은...

 

한 점당
50마르카 어떠세요?

 

후회하실 텐데요

 

제가 좋은 가격에
팔아 보도록 하죠

 

그래요

 

쉐르벡 씨는

 

정말 타고난 예술가예요

 

다른 사람들도
그 재능을 알아보도록

 

저희가 노력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네 오빠가
먼저 먹어야지

 

동생한테
양보할 필요 없어

 

오늘 잘했어

 

우리 부자 될지도 몰라

 

네 덕분에

 

300마르카 나왔습니다

 

300마르카
다시 한번 여쭤봅니다

 

다른 분 안 계십니까?

 

더 이상 응찰이 없으시면

 

최고가 300마르카에
낙찰되었습니다

 

괜찮아 보이는데요

 

처음부터 제가 했으면
더 쉬웠을 거예요

 

이미 걸려 있는 상태에서
손을 보려니까 어렵네요

 

빛이 마음에 안 드는데
좀 도와주시겠어요?

 

비켜 보세요

 

본인 작품을 보는 게
불편하세요?

 

형편없잖아요

 

이런 빛에서는 더 그렇네요

 

밤새 여기서
그림을 좀 고쳐야 할까 봐요

 

내일 다시 열기 전에요

 

그러세요

 

화구를 가지러 가시죠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뭐 하는 분이라고 하셨죠?

 

산림 감독관이자 작가예요
그림도 독학했고요

 

사실 전시회 얘기도

 

에이나르가 먼저 꺼냈죠

 

빛이 마음에 안 들어요

 

- 조금만 열어도 될까요?
- 한 시간 후에 같이 살펴보죠

 

됐어요

 

다른 쪽도요

 

그만

 

조금만 더요

 

커피 한잔 어떠세요?

 

좋죠

 

여기 처음이에요?

 

헬싱키에
15년 만에 왔는걸요

 

그래도 아다랑
마리아, 베스테르와 함께

 

카페에서
살다시피 한 적도 있어요

 

도시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했는데요

 

특히 파리요

 

파리는 지저분해요

 

- 파리가 싫으세요?
- 아뇨, 좋아하죠

 

너무 지저분한 도시라
마음에 드는걸요

 

특유의 냄새가 있어요
달궈진 돌과 썩은 꽃

 

씻지 않은 몸에서 나는
냄새가 뒤섞여 있죠

 

도시 얘기도
참 예술적으로 하시네요

 

도시에서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요

 

들어가려고 줄까지 섰네요

 

이번 전시는 대성공이에요

 

신문 안 보셨어요?

 

 

안 볼 거예요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하거든요

 

살면서
좋아하는 색도 바뀌더군요

 

특정한 색이
싫어지기도 하고요

 

- 그래요?
- 한때는 보라색을 싫어했어요

 

지금은 괜찮아졌고요

 

베이지색은요?

 

많이 쓰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세밀한 부분에는 잘 안 써요

 

배경색으로만 사용하죠

 

베이지색 옷을 입은 사람은
잘 못 그리겠더라고요

 

그러면...

 

황토색이나
코발트색, 짙은 회색은요?

 

제가 좋아하는 색이죠

 

알아요

 

인터뷰 읽어 봤거든요

 

그림 그리시는 거
보러 가도 될까요?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그림 그리는 게 비밀도 아닌데
왜 안 되겠어요

 

같이 그림 그릴 수 있게
화구도 가져와요

 

그렇게 하죠

 

감사합니다

 

계속 앞으로!

 

- 어쩐 일이야?
- 네 오빠가 할 말이 있다는구나

 

그게...

 

지난 전시회 수익금 1만 마르카가
나한테 들어왔어

 

가족끼리
나눠 가질 거야

 

안 돼

 

그림을 그린 사람은
나라고

 

오빠가 아니라

 

오빠는 집 설계해서 번 돈
나눠 준 적 없잖아

 

원래 그런 거야
법이 그렇다고

 

넌 작품 소유권이 없어

 

네 오빠가 마음만 먹으면
다 가질 수도 있지만

 

남들 보기에 좋지 않으니
그렇게 안 하는 거야

 

법이 그렇다고 해도...

 

난 용납 못 해

 

사람들이 수군댈 거예요

 

지금은 내전 중이니
행동을 조심해야 돼요

 

여기서 뭐 하니?

 

이것저것요

 

다음엔 뭘 그릴지
생각도 하고요

 

여기서 뭐 하시는데요?

 

네 오빠한테 미안하니까
그림이라도 갖다주려고

 

그림은 어디서 찾았어요?

 

나도 선반에 손 닿거든

 

내 그림을
왜 그냥 가져가요?

 

이런...

 

흑연인가요?

 

다른 거로는 표현 못 해요

 

연백과 토끼 가죽
아교군요

 

네, 조용히 좀 해 줄래요?

 

이리 와 보세요

 

이걸 심으려고요

 

그림 옆에 난초를 놔두면
근사할 거예요

 

- 그럼 심어 보죠
- 가요

 

'당신과 함께 죽는다고 해도
당신을 부인하지 않을 겁니다'

 

하파란다의 설교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해요

 

주시죠

 

탐미사리에
가족 별장이 있어요

 

나랑 같이 가서
그림 그리면 어때요?

 

- 탐미사리에요?
- 네

 

고마워요

 

당신을 그려도 될까요?

 

네?

 

당신을 그리고 싶어요

 

그 모습 그대로요

 

뱃사람 같아요

 

움직이지 말아요

 

지금 여섯 시간째예요

 

그렇군요
열 시간만 더 버텨요

 

살려 줘요

 

죽이진 않을 테니
걱정 마요

 

이리 와 봐요

 

잡아요

 

부드럽게 긁어 봐요

 

아교는 그냥 놔두고요

 

- 캔버스가 찢어지면 어떡해요?
- 그럼 안 되죠

 

가까이 잡아요

 

녹색 안료를
더 섞어 봐요

 

피부색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어요

 

모자 벗어

 

그림 그리는 데
방해가 돼서 그래

 

움직이지 말고

 

고맙다

 

탐미사리에서
있었던 일 말인데요

 

뭔데요?

 

아니에요

 

- 라플란드에는 또 언제 가요?
- 내일요

 

탐미사리 얘기는 뭐예요?

 

신경 쓰지 말아요

 

얼마나 있다 와요?

 

길면 3주 정도요

 

토르니오에
산림 관련 일이 있어요

 

우리 편지하기로 해요

 

딱 한 통씩만

 

왜 한 통이에요?

 

그렇게 하면
특별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참 엉뚱하네

 

자주 쓰기 귀찮아서
그런 거죠?

 

아니에요

 

뭐...

 

아니라는 걸 증명해 봐요

 

길게 써서 보내 달라고요

 

알겠어요
그 대신 딱 한 통만이에요

 

짧게 쓰기만 해 봐요

 

기분 별로야?

 

왜?

 

웃을 때 너무 슬퍼 보여서

 

아니야... 모르겠다

 

왜 그렇게 생각해?

 

예술가라면
다 슬픔이 있기 마련이잖아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정말 신물이 나

 

헬싱키는 너무 정신없어

 

정치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든다니까

 

다 쓸데없지

 

전쟁도 끝났는데

 

여성동맹연합 활동은
진전이 없어

 

참정권 문제도
갈 길이 먼데

 

이젠 지쳐서
독기만 남았어

 

넌 항상 그랬잖아

 

에이나르는
아직도 답장이 없어

 

뭘 그렇게
목이 빠지게 기다려?

 

에이나르는 아직 젊잖아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힘을 얻지

 

항상 좋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암울하지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몇 명이나 올까?

 

뭘 그런 것까지
걱정하고 그래

 

몇 명 안 오겠지

 

더는 사람들한테
실망하고 싶지 않아

 

다른 얘기 하자

 

발바닥에 큰 혹이 생겼어

 

다행히 염증은
없는 것 같아

 

- 한번 볼래?
- 아니

 

기차 시간 늦겠다

 

갈게

 

없나 봐요

 

어떤 걸 찾는데요?

 

완벽한 거요

 

벌써 세 시간이나 됐어요

 

그래요?
얼마 안 됐네요

 

여전하네요

 

바로 이거예요

 

집중해요, 에이나르

 

내가 그린 가우스달 풍경화
가지고 있다고 했죠?

 

직접 가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 봐요

 

노르웨이에 가서요?

 

왜요?

 

당신이 그러면 좋겠어요

 

난 여기서
함께 그림 그리고 싶은데요

 

내가 돈 줄게요
장학금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요

 

당신도 나와 같은 경험을
꼭 해 보면 좋겠어요

 

혼자 경험해 봐야 돼요

 

나중에 스케이 얘기도
들려줘요

 

아름다운 곳이거든요

 

지금은 가고 싶지 않아요

 

내 호의니까

 

거절하지 말아요

 

돌아와서
다시 같이 그려요

 

생각해 볼게요

 

보고 싶을 거예요

 

-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됐어

 

2주예요

 

매일 편지하겠다고 했는데

 

지난주에도 안 왔다고요
난 여덟 통이나 보냈는데

 

너무 초조해하지 마

 

돈도 별로 없으면서
그런 여행을 보내 주다니...

 

우리 집 여자들은
남자 때문에 울지 않아

 

항상 의연하게
품위를 지켜 왔지

 

어련하시겠어요

 

뒷정리 좀 해라

 

오늘은 싫어요

 

베스테르에게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무서운 악몽을 꿨는데
너무도 생생했어

 

에이나르가 걱정돼서
이런 꿈을 꾸나 봐

 

내겐 버팀목 같은 존재였어

 

지난 2년간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줬지

 

에이나르가 그리워

 

돌아오면
전부 솔직히 말할 거야

 

다 털어놔야지

 

누가 보냈어?

 

에이나르

 

왜 그래?

 

- 무슨 일이야?
- 모르겠어요

 

- 헬렌, 문 열어 봐
- 그냥 가

 

문 열어 보라니까

 

나 좀 내버려 둬!

 

문 열어 봐

 

어서!

 

헬렌, 이러지 마

 

문 좀 열어 봐

 

헬렌

 

그냥 가라고

 

나 좀 내버려 둬

 

참 곱기도 하지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가정을 꾸리고 싶겠지

 

나는요?

 

난 뭐가 되죠?

 

내 가정은요?

 

너 진짜
잘해보려고 한 거야?

 

에이나르는 젊잖니

 

넌 사람을
너무 믿어서 탈이야

 

다시는 내 인생에
참견 말아요

 

또 이러쿵저러쿵하면
가만 안 있을 거라고 했던 말

 

기억해요?

 

기억하시냐고요

 

생각 안 나요?

 

네?

 

기억하지

 

다행이네요

 

당신 말처럼
요양원이 독특하더군요

 

가우스달은 정말 아름다워요

 

'튀라'라는 여자를 만났는데
나이는 18살이에요

 

우리 약혼했어요

 

헬렌 쉐르벡 면회요

 

심장에 무리가 왔어요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것 같아요

 

심각한 건 아니고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또 올게요

 

일단 푹 쉬어

 

다들 널 기다리고 있어

 

내가 신경 많이 쓸게

 

약속하마

 

너한테 시 읽어 주려고

 

책을 읽는 사람은
위대한 영혼들이 사는 세상으로

 

탈출할 수 있다고 하잖아

 

에이노 레이노의
시 선집인데

 

제목은 '자유의 책'이야

 

'젊음은 나의 대지'

 

'내 안에도
젊음이 가득하도다'

 

'아침이 일찍
우리의 문을 두드렸다'

 

'우리는 산 너머로
동이 트는 모습을 보며'

 

'서둘러 산을 타고
올라갔다'

 

뭘 보는 거예요?

 

바다요

 

그림 안 그려요?

 

지금 그림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당신을 연구해 보려고요

 

왜요?

 

이 그림 때문이죠

 

당신의 예술 세계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요

 

조건이 하나 있어요

 

뭔데요?

 

당신을 그리고 싶어요

 

언제요?

 

나중에 알려 줄게요

 

'서둘러 산을 타고...'

 

베스테르

 

그만 읽어도 돼

 

다음번엔
셀마 라겔뢰프 책을 가져올게

 

안 그래도 돼

 

그냥 옆에 있어 줘

 

좋아요

 

날 보지 말고요

 

왜 안 돼요?

 

똑바로 쳐다보면
내가 그릴 수가 없잖아요

 

제 편지를 받았나요?

 

헬렌은 아직 아파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

 

헬렌의 오빠한테도
오지 말라고 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 안 해도 돼요

 

헬렌이 다 나으면
다시 와요

 

약혼녀랑 좋은 시간 보내요

 

- 의사는 매일 오나요?
- 아뇨

 

계속 침대에만
누워 있게 하면 안 돼요

 

그만 가요, 젊은 친구

 

죄송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이...

 

혹시 없을까요?

 

뭘 하고 싶은데요?

 

나 바보 아니에요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의도를 모르겠네요

 

이제 그만 가요

 

할 말이 정말 많아요

 

이 꽃이라도
전해 주실래요?

 

누가 배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아

 

밤에 쓸 펜이랑 종이
여기다 놓을게

 

아플 땐 그림을 그려 봐

 

꽃 예쁘다

 

고마워

 

나 이제 집에 가야 될까?

 

안 가고 싶으면
더 있어도 돼

 

내가 장이랑 헤어졌을 때
네가 했던 말 기억 나?

 

이렇게 말했어

 

'다시 일어설 땐
담금질한 쇠처럼 더 단단해지길'

 

헬렌에게

 

생각을
말로 옮기기가 어렵네요

 

헬싱키로 돌아가려 해요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병원에 있을 때도 찾아갔는데
못 만나게 하더군요

 

마음이 아팠어요

 

책 작업은
잘되고 있어요

 

여름이면 초고가
나올 거예요

 

당신의 영원한 친구
에이나르가

 

와 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지

 

훨씬 좋아졌어

 

헬싱키 예술 협회 봄 전시에서
네 작품 아홉 점을 선보인대

 

괴스타가 나를
연약한 불구자로 홍보하더라고

 

못마땅하긴 해도
그렇게 해야 그림이 잘 팔린다잖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괴스타가 '흰옷을 입은 여인'을
예술 협회에 넘겼어

 

아테네움에 있던
작품 말이야

 

응, 들었어

 

다시 그림
그리기 시작했어

 

잘 생각했어

 

엄마 생신은
아주 근사할 거예요

 

- 넷이 모일 거고요
- 누가 오는데?

 

엄마랑 저
그리고 비스킷 두 개요

 

그림은 왜 그리니?

 

그 손재주 가지고

 

러그 디자인만 해서
팔아도 되잖아

 

- 실력 있는 화가는 널렸어
- 아니에요

 

핀란드 제일의
여성 화가라고요

 

돈은 엉뚱한 사람들이
벌고 있지

 

보헤미아니즘의
맨 마지막 법칙이 뭔지 알아?

 

'스스로
삶을 마감해야 한다'

 

'하지만 선택은 자유다'

 

엄마, 부탁이에요
그러지 마세요

 

이제 막 회복 중이잖아요

 

이미 초대했어

 

모레 에이나르가 올 거야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에이나르가 차를 가지고

 

- 직접 운전해서 올 거야
- 안 돼요

 

널 도와주고 싶었어

 

진심으로

 

새 옷도 만들자꾸나

 

들어와요

 

이쪽은 제 약혼녀
튀라 아르프예요

 

안녕하세요

 

정말 영광이에요

 

다녀와

 

친척이라고요?

 

네, 가까운 친척은 아니에요

 

정말 귀엽지 않아요?

 

내가 보낸
튀라 사진 봤어요?

 

더는 듣고 싶지 않아요

 

가우스달은 어땠어요?

 

영원히 잊지 못할
곳이었어요

 

예술가라면
다들 그렇게 느낄 거예요

 

우리 우정은
내게 정말 소중해요

 

- 잃고 싶지 않아요
- 우정 따윈 잊어요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요

 

커피 잘 마셨어요

 

당신의 다정함 때문에
그나마 참았어요

 

우리 우정이 소중하다는 말
진심이에요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어요

 

내가 어떻게 해 줄까요?

 

이 고통을 끝내 줘요

 

가라고요

 

에이나르

 

미안해요
내가 말이 심했어요

 

언제든지 편지해요

 

그럼 고마울 거예요

 

아주 잠시

 

이 그림도 내 것이었고

 

당신도 내 것이었어요

 

그때 당신은 슬퍼 보였지만
난 그 누구보다 행복했어요

 

내가 받은 사랑은

 

물거품과 같아서

 

이내 사라지고 말았네요

 

외로움이 내 위로 날아올라
날 감싸 안아요

 

이건 내 선물이에요
에이나르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어요

 

잘 지내요

 

헬렌 쉐르벡 보냄

 

애쓰지 말아라

 

나한테는
손톱만큼도 관심 없잖니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

 

요즘 집안 꼴이 이게 뭐냐?

 

넌 집안일도 안 하고
난 한가롭게 모델이나 하고 있고

 

오빠네랑 같이 살고
싶지 않다면서요

 

엄마랑 딸이
같이 살면 좋잖니

 

엄마한테 저는
항상 오빠보다 뒷전이었잖아요

 

이제 못 참겠어요

 

무슨 엄마가 그래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래

 

내가 마그누스네 집으로 가마

 

네가 맨날 바라던 바잖니

 

그림 그릴 공간도
더 많아지니 좋겠구나

 

에이나르랑
같이 살아도 되고

 

가세요

 

어서요

 

헬렌

 

몸을 따뜻하게
해야 돼요

 

창문도 닫을게요

 

헬렌

 

헬렌

 

내가 그렇게
힘센 남자는 아니지만

 

도끼로 이 문 정도는
부술 수 있어요

 

도끼 어디 있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나이 든 여성 화가가'

 

'이토록 훌륭한 작품을
선보이다니 정말 놀랍다'

 

'나이 든 여성 화가'?

 

누구 얘기인지
통 모르겠네요

 

나도 이 표현에는
동의를 못 하겠는데요

 

이런 무례한 말은
마음 넓은 우리가 이해해 줍시다

 

어때요?

 

'이러한 작품 세계는'

 

'전 세계
어느 예술가와 비교해도'

 

'단연 돋보인다'

 

그 말은 듣기 좋네요

 

너무 띄워 주는 거
같은데요

 

불 때는 것 좀 도와줘요

 

춥네요

 

어때요?

 

내년 가을에
스톡홀름에서요

 

- 누가 관심은 있대요?
- 알아보면 되죠

 

전시회를 열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예요

 

이 상태로
어떻게 하겠어요

 

기분 전환 하는 거죠

 

내가 최근에 그린 그림
안 봤어요?

 

와서 좀 도와줘요

 

쌀쌀맞은 표정은
여전하시네요

 

그림이 뭐 이래?

 

너무 추하다

 

이런 그림을 누가 사려고 하겠어
보기도 거북한데

 

모습은 추할지 몰라도
영혼은 빛이 나

 

'추하지만 독창적인 그림'으로
팔아야겠네

 

- 영혼의 빛이라...
- 사실성은 한참 전에 버렸어

 

삶이 나를 바꿔 놓았지

 

내면은 더 단단해졌고

 

일부러 안 팔릴 그림만
그리는 거지?

 

- 네 오빠도 마땅찮아하던데
- 이 집에서 나가고 싶으세요?

 

오빠 집에 못 계시니까
제가 마음 약해서 모시는 거예요

 

드세요

 

- 옷...
- 네?

 

네 오빠 옷 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가여운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목사님은 어디 계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야?

 

아래층에 있는 더 넓은 방으로
엄마를 옮기자

 

'그들은 세 소녀를 죽여서'

 

'조그마한 심장에
감춰진 것을 보았다'

 

'첫 번째는 기쁨이었다'

 

'서리가 내린 땅에'

 

'피가 흩뿌려졌다'

 

베스테르에게

 

엄마와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고 해

 

오랜 세월, 엄마와 나는
각자 다른 섬에 사는 듯이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질러 댔어

 

그런데 엄마는 지금

 

자기만의 섬에 누워
말도 못 하고 있지

 

하지만 엄마는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줬어

 

내가 성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지

 

가서 작별 인사 해
수의로 갈아입혀 드렸어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침묵이 두드러지지 않아?

 

그렇네

 

내일 에이나르
만나기로 했어

 

정말?

 

 

이 그림은
괴스타에게 줄 거야

 

고마운 사람이니까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해 봐요

 

내가 실수했어요

 

실수?

 

잘못된 선택이었어요

 

실수는 누구나 해요

 

약혼을
너무 서둘러 했나 봐요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가장
눈부신 예술가예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특별하죠

 

고마워요

 

'회복기 환자'는

 

'아테네움의 유일한 보석'으로
불려요

 

그래요?

 

진실성이 없다고 하던데요

 

캔버스 위의 리듬이
너무 거칠고 불안정하다고요

 

그 얘기가 맞아요

 

난 그런 사람이니까요

 

한번 찾아갈게요

 

그래 주면 나야 고맙죠

 

다정하게 챙겨 주는 건
여전하네요

 

고마워요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아요?

 

좋아요

 

튀라, 자신감을 가져

 

그림을 그리면서
벗은 뒷모습을 항상 바라봤는데

 

어째서 에이나르는
내 마음을 읽지 못한 걸까?

 

어쩌면...

 

잘못 읽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이제
다시 궁금해지네

 

진실은 뭐였을까?

 

이젠 알 듯도 해

 

꿈이 시간과 손을 잡고

 

우리에게서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져 가

 

꿈과 시간은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지

 

인생을 살면서

 

이루려고 애썼던 것들은
이내 잊히고...

 

결국 남는 것은
새하얀 종이뿐이야

 

그리고 환희가 찾아오지

 

헬렌 쉐르벡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946년 1월 23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헬렌과 에이나르 레우테르는
계속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냈으며

 

서로 1,100통이 넘는
편지와 엽서를 주고받았다